
제주도의 동쪽은 햇살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이다. 이른 새벽, 붉은 빛이 바다를 물들이고, 성산일출봉의 실루엣이 서서히 드러날 때면 누구나 그 장엄함에 숨이 멎는다. 성산일출봉을 중심으로 한 섭지코지, 광치기해변, 세화리 일대는 ‘빛의 여행지’로 불린다. 이번 글에서는 동부 지역을 하루 코스로 천천히 즐기는 제주 여행 루트를 소개한다.
동부 여행의 시작, 빛이 먼저 닿는 성산일출봉
제주의 동쪽 끝에는 해돋이의 상징, 성산일출봉이 있다. 10만 년 전 해저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분화구 지형으로, 자연의 힘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장소다. 정상까지는 약 20~30분 정도 걸리며, 완만한 경사와 정비된 계단 덕분에 누구나 오를 수 있다. 새벽 어스름이 가실 무렵, 산 아래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와 함께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해돋이는 제주의 어느 풍경보다 강렬하다. 일출봉 아래에는 광치기해변이 자리한다. 해수욕보다는 산책이나 사진 촬영을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썰물 때는 바닷물이 빠지면서 초록빛 이끼가 깔린 현무암이 드러나고, 붉은 하늘빛이 바위에 반사되어 환상적인 장면을 만들어낸다. 아침 햇살이 비추는 그 순간, 사진가들이 모여드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성산일출봉 인근에는 지역 주민들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와 식당이 많다. ‘일출정식’, ‘전복죽’, ‘성산해물뚝배기’ 등은 새벽 등반 후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대표 메뉴다. 그중에서도 성산항 근처의 ‘성산일출회센타’는 싱싱한 회와 함께 바다 전망을 즐길 수 있어 여행자들에게 인기가 높다. 만약 해돋이를 본 후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싶다면, 성산포항 부근의 산책로를 따라 걷는 것도 좋다. 조용한 바닷길을 따라 걷다 보면, 관광객의 소음 대신 갈매기 울음소리와 바람 소리가 귓가에 남는다. 하루의 시작을 이렇게 여유롭게 맞이하는 여행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느껴진다.
섭지코지 풍경, 바람과 바다가 만든 길
성산일출봉에서 차로 10분 정도 달리면 도착하는 곳이 바로 섭지코지다. 이름 그대로 ‘좁고 긴 곶’을 뜻하는데,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산책로 중 하나로 손꼽힌다. 파도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해송이 줄지어 선 언덕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곳이 왜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자주 등장하는지 알 수 있다. 섭지코지의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은 유민미술관(구 글라스하우스)이다.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작품으로, 유리와 콘크리트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구조다. 건물 안에서는 미술 전시가 열리기도 하고, 옥상 카페에서는 탁 트인 바다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날씨가 맑은 날이면 멀리 성산일출봉까지 보인다. 산책로 끝자락에는 등대가 있다. 붉은색의 소박한 등대지만, 그 아래로 펼쳐지는 바다 풍경이 압도적이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에는 파도가 등대 아래 암석에 부딪히며 하얀 포말을 일으킨다. 그 장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린다. 섭지코지는 사계절 모두 아름답다. 봄에는 유채꽃이 노랗게 물들고, 여름에는 푸른 하늘과 짙은 바다가 대조를 이루며, 가을에는 붉은 억새가 언덕을 덮는다. 겨울의 섭지코지는 고요하다. 바람이 불고 하늘이 낮게 깔려 있어도, 그 안에는 묘한 평화가 있다. 근처에는 ‘섭지코지 해녀의집’이나 ‘성산코지횟집’ 같은 식당이 있어 신선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 특히 해녀들이 직접 잡은 소라와 전복이 들어간 물회는 이 지역의 별미다. 식사 후에는 카페 ‘코지바당’에서 커피를 마시며 유리창 너머로 파도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세화리와 종달리, 여유로운 제주 감성의 끝
섭지코지에서 북쪽으로 차를 조금만 몰면 세화리에 닿는다. 이곳은 관광객보다는 제주 사람들의 일상이 남아 있는 조용한 마을이다. 하지만 감각적인 카페와 디자인 숍들이 하나둘 들어서며, 지금은 ‘로컬 감성 여행지’로 사랑받고 있다. 세화의 대표 명소는 세화해변이다. 해안선이 길게 뻗어 있고, 바닥이 자갈로 이루어져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물빛이 유난히 맑아 바닥까지 비치며, 바람이 잔잔한 날에는 수평선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해변 바로 옆에는 ‘카페공작소’, ‘세화상회’ 같은 로컬 카페가 있으며, 커피 한 잔을 들고 해변을 걷는 여행자들의 모습이 낭만적이다. 조금 더 이동하면 종달리 해안도로가 이어진다. 제주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도로 한쪽에는 푸른 바다, 다른 한쪽에는 돌담과 감귤밭이 이어진다. 봄에는 유채꽃이 도로 옆을 노랗게 물들이고, 여름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파란 하늘이 펼쳐진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달리면, 그 순간만큼은 모든 근심이 사라진다. 종달리에는 ‘종달리 해녀촌’이 있다. 실제 해녀들이 잡은 해산물을 바로 조리해 판매하는 작은 식당으로, 현지의 정취를 느끼기에 제격이다. 싱싱한 소라와 해삼, 성게비빔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제주 바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화와 종달리 일대의 매력은 ‘느림’이다. 관광지처럼 붐비지 않아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한참을 앉아 있어도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고, 마음도 차분해진다. 이런 평화로운 감정이 바로 제주 동부 여행의 진짜 매력이다.
제주 동부 여행은 빛과 바람, 그리고 고요함이 만들어내는 예술이다. 성산일출봉의 새벽, 섭지코지의 푸른 바다, 세화리의 느린 오후까지. 하루의 시작과 끝이 모두 자연 속에서 이어진다. 바쁘게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 걸음을 늦추고 바다를 바라보는 그 순간, 진짜 제주의 시간이 흐른다. 이번 여행에서는 단 한 장의 사진보다, 한 번의 깊은 호흡을 남겨보자.